부동산경매무료강의

[스크랩] 평산신씨 영해파 중시조 불훤재 신현

sinsu552507 2017. 4. 15. 11:32

평산신씨 영해파 중시조 불훤재 신현

(1298 ∼1377, 충렬왕 24 ∼ 우왕3년)

 

 

불훤재 신현은 평산신씨 영해파의 중시조(과거 영해신씨 시조)이시며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파조되시는 이유헌 諱 신득청님의 조부이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신경(信敬) 호는 운월재(雲月齋)라 하였는데 후에 명(明)나라에 갔을때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주원장(朱元璋)이 그의 학문에 크게 감동하여 그를 신자(申子)라 칭하고 호인(浩仁)이란 자와 불훤재(不諼齋)란 호를 내렸다고 한다. 제25대 충렬왕(忠烈王)24년(1298)에 국자박사(國子博士) 정민공(貞敏公) 신중명(申仲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봉랑(朝奉郞) 신연(申衍)의 손자이며 고려개국공신 태사 장절공 신숭겸의 13세손이다.

일찍부터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충숙왕(忠肅王) 2년(1315)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문과를 주관하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는 각각 이진(李瑱)과 윤혁(尹赫)이다. 신현은 좌주(座主) 이진과 윤혁의 문생(門生)이 되었는데 이진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아버지로 우탁과 더불어 안향(安珦)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은 학자이다.

충숙왕 5년(1318)에 진선좌복사(進善左僕射)가 되고 충숙왕 8년(1321)에 왕이 조적(曺頔)의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부터 소환되자 왕을 호종하였다. 조적은 의흥부(義興部)의 역리(驛吏)출신으로 충렬왕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충선왕(忠宣王)의 총애를 받아 우상시에 올랐고 충숙왕 7년(1320)에 선부전서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고관들과 재산 싸움을 벌여 왕의 미움을 받게되자 원나라로 도망가 잦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헐뜯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서 억류되어 있는 동안 충숙왕과 종형제간인 심왕 고(瀋王 暠)의 왕위 찬탈공작에 가세하였다. 당시 원나라 황제는 영종(英宗)이었다. 그는 1320년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충숙왕의 부왕 충선왕을 토번(吐藩:티베트)로 귀양 보낸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충숙왕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충숙왕은 사면초가에 놓여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1323년 8월 철실(鐵失)에 의해 영종이 시해되고 태정제(泰定帝:진종)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태정제는 충선왕의 손위 처남이었기 때문이다. 충선왕이 귀양에서 풀려나고 충숙왕 13년(1326)에 귀국할 수 있었다.

신현은 왕이 원에 체재하고 있는 5년 동안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왕의 병풍 역할을 했다. 귀국한 뒤 신현의 명성은 원나라에까지 알려져 충혜왕(忠惠王) 원년(1331)에는 원의 학자 32명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고려에 왔다. 이때 신현의 나이 34세였다. 충숙왕 복위2년 (1333)에는 이들 원나라 학자들과 같이 다시 원나라에 갔다가 충숙왕 복위7년(1338)에 귀국하였다.

귀국 다음해인 1339년에 충혜왕이 복위하자 조적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좌되어 최해(崔瀣) 윤선좌(尹宣佐) 이조년(李兆年) 김광철(金光徹) 등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조적과는 무관하였으나 충혜왕의 난정에 비판적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탁(禹倬)의 강력한 간언으로 얼마 후 풀려났다.

충혜왕 복위2년(1341)에는 원의 직학사(直學士) 주공천(朱公遷)이 생도 28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해에 이들과 함께 원나라에 다시 또 들어갔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우탁의 부음을 듣자 귀국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이어 가솔들을 거느리고 안동의 예안(禮安)으로 이사하여 우탁의 집을 돌보며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1334년 충목왕(忠穆王)이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안축(安軸)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 이곡(李穀) 등의 추천으로 사부(師傅)가 되어 조정에 나갔으나 그가 올린 직언이 왕의 측근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하옥의 명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간언으로 풀려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충정왕 원년(1349)에 원의 주공천이 구양현(龜陽玄) 계언양(桂彦良) 등 46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다음해에 이들이 귀국하면서 그를 설득하여 다시 원에 들어갔다가 공민왕 3년(1354)에 귀국하였다.

공민왕이 수차에 걸쳐 벼슬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주공천이 죽자 원에 들어가 조문하고 공민왕 11년(1362)에 귀국하였다. 이때 신돈(辛旽)이 득세하자 그는 이를 항상 비판, 성토하였는데 이로서 미움을 받아 공민왕 14년(1365)에는 그의 집주위에 가시덩굴을 쳐서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는 위리안치(위리안치)처분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가 저술한 논저들을 찾아 불태웠다. 다음해에 사의(司儀) 정추(鄭樞)와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그 부당함을 극간하여 겨우 풀려났다.

공민황 19년(1370)에 이색, 정몽주 등의 천거로 왕의 사부(師傅)가 되자 그는 신돈의 악행을 맹렬하게 탄핵하였으며 공민왕 21년(1372)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명나라에 들어갔다. 이에 신돈이 반역죄로 주살되었다.

신현은 명나라에서 명의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사부(師傅)의 예우를 받았으며 우왕(禑王)3년(1377)에 귀국하여 영해백(寧海伯)이란 작호를 수여받았다. 귀국한뒤 얼마후에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사후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위에 적은 신현의 구체적 행적은 우탁의 역동선생실기(易東先生實記)와 화해사전(華海師全) 및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에 보이는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관련 저작에 대해서는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위에 적은 그의 행적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또 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는 문헌들도 신빙성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로 볼 때 위의 사실은 그 과장여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탁의 역동선생실기의 문인록에는 신현을 제일 먼저 거론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정(誠正)의 학문을 널리 밝혀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우탁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학맥을 신현에게 전수했다면서 그를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도록 당부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상산김씨보(商山金氏譜)에는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이경(李瓊)등이 신현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는 우탁이 저술한 초학개몽편(初學開夢篇)과 가례요정편(家禮要精篇)을 신현이 교정하였는데 고려가 망하면서 신현의 반대파인 정도전이 이를 수색하여 소각하였고 이후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그의 사적을 기록에서 일체 누락시켜 버렸다고 적고 있다. 범세동은 신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아들 용희(用羲)는 보문각대제학과 판문하부사 동평장사(判門下府事 同平章事)에 올랐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역동선생실기,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출처 :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글쓴이 : 이장희 원글보기
메모 :